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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ween Scylla and Charybdis, Space Pado, 2025

계란을 실수로 깨뜨린다. 표면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순간, 노른자와 흰자와 알끈이 사이로 새어 나온다. 주워 담아보려고 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이미 세상은 깨졌기 때문이다.

언젠가의 선원들이 바다를 건너다가 스킬리와 카리브디스 사이에 당도했을 때, 그들은 선택을 해야했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물 아래의 카리브디스와, 여섯개의 개 머리를 가진 스킬라 사이에서, 그들은 바다 너머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과 인생을 걸고 배 모조리를 카리브디스에게 넘겨주거나, 여섯 명의 선원만을 희생하는 것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해야 할 지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머리로는 여섯 명의 선원을 스킬라에게 내어주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흰 벽들 사이, 캔버스 천 위의 이미지는 그것을 이루는 아주 작은 점으로부터 시작되어 붓질로 종합되다가, 결국에는 특정한 모습을 갖추게 된 어떤 형상이다. 멀리 떨어져 바라본 형상의 실루엣 안쪽에 놓여 있어 쉽게 잃어버리고 마는 것들, 손바닥만한 캔버스에 모래알처럼 작게 쌓인 쌀알 크기의 점부터, 벽면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선들까지, 형상 아래에 묻힌 것들은 보이지 않아도 그 밑에 있다. 신체 스케일을 초과하는 화면을 앞에 두었을 때는 뒤로 물러서고, 비교적 작은 스크린의 기기로 사진을 찍고, 축소하거나 확대해가면서 형상들을 마음대로 주무른다. 작은 붓으로 그려진 작은 그림들을 줌으로 당겨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그것이 얼마나 섬세한  지를 더듬는다. 우리는 발걸음 혹은 손가락의 작은 움직임을 통해 얻었다고 믿는 선택권을 행사한다. 그것이 수치 데이터로 이루어진 가상의 픽셀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앞에 서 있는 거대한 벽이거나, 우리와는 조금 멀리 떨어진 작은 조각들이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완벽한 순간은 깨진다. 결국에는 무언가를 버려야 하는 순간에 때로 떠오르는 마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싶다는 자기파괴적인 욕구이다. 어차피 계란이 깨졌다면 모든 걸 버려. 어차피 우리 중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그냥 다같이 죽자. 선택을 내리는 것은 스스로가 걸릴 덫을 고르는 것, 멀어진다면 벽에 부딪힐 것이고 가까워지려 한다 해도 벽이 가로막고 있을 것이다. 배를 모조리 희생하는 대신 여섯 명의 죽음을 택하는 것이 숲을 보기 위해 나무를 보지 않기로 택하는 것이라면, 나무를 바라보기 위해 숲을 잃으려는 시도는 카리브디스에게 먹히기를 기다리는 시도일 수 있다.

 

박지원과 이지연이 각기의 거리를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을 보기 위한 의지인 동시에, 무엇을 잃는 것을 감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지원이 선택하는 거리는 대상과의 거리를 억지로 벌려 놓음으로써 전체를 포획하려는 것으로, 이는 스킬라에게 여섯 선원의 머리를 내어 주기로 선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각 그림이 개별적으로 지시하는 이야기의 단서는 자꾸 그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일종의 미련과 마음의 부채감으로 남겨둔다. 여섯 명을 죽이기로 결심해놓고 뒤 돌아서니 조금은 미안하고 조금은 불행해지는 것이다. 공주였던 스킬라가 저주를 입어 여섯 머리의 괴물이 되는 상황과 일본의 요괴(yokai)들 중 목이 아주 길고 반은 뱀이 되었다거나, 머리 뒤에 또 다른 입이 달린 온나(onna)들이 중첩되어 분절적인 캔버스에 담긴다. 그리고 그 타일같은 캔버스들을 약 2.5m 거리의 유리창 너머로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설정된다. 그림이라는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무언가를 면밀히 관찰하여 눈으로 소화해내고, 그것을 소유하거나 완전히 안다고 인정하고 싶은 욕구는 유리창이라는 물리적인 장애물과 그것이 유발하는 거리감으로부터 실현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스토리텔링과 형상의 유사함 안에서 그림의 도상이 연결되면서도 연결에 실패하고 전체의 풍경을 이루면서도 깨지는 진폭은 그의 그리기 속 단위들이 내부를 추적하는 조밀함을 취하면서도 가까이 다가서서 그것을 볼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과 유사하다.

이지연의 그림이 놓이는 상황은 전체를 포착하려는 대신, 그 일부의 질감과 파편에 가까이 다가서려 하는 반대편에서 출발한다. 작업은 풍경을 보여주면서도 상이한 물질의 집적이나 물질의 흔적, 혹은 구체적인 도상들, 예컨대 오필리아처럼 누운 두 여자와 원숭이, 고슴도치 인형 등으로 구성된다. 화면은 어떠한 위계도 없이 작업자와 관객으로서의 상대, 화면 위의 붉은 색 스트로크와 초록색 면과 작은 원숭이가 동일한 무게로 존재할 수 있는 평평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땅을 갈아내듯 존재한다. 공간에서의 기억이 발 밑에서 꾸물거리던 벌레들로 인해 변화하는 것처럼, 가까이에서 바라본 화면에 기생하던 작은 인형과 버섯들은 큰 파도와 방의 풍경을 새롭게 매듭짓는 털실이 된다.

이렇듯 풍경의 완결이 아닌 균열을 응시하려는 태도는 폭 1미터 정도의 좁은 공간 안에서 화면을 마주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동시에 화면을 가로지르는 선들은 시야의 경계를 확장하며 화면을 물러나서 바라보고 싶다는 욕구를 갖게 하지만, 완전한 밀착을 망설이며 뒷걸음질 치는 발걸음은 등 뒤의 벽에 닿으며 부서진다. 카리브디스의 소용돌이에 빨려들기 직전의 배처럼, 화면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힘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순간을 가진다. 전체를 포기하지 못한 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주저하는 마음 속에는 형상을 잃고 싶다는 파괴적인 욕구와, 그럼에도 균열이 이뤄내는 새로운 풍경을 보고싶다는 충동이 공존한다.

 

보물상자가 숨겨진 숲의 모양을 확인하려고 하거나, 몇 번째 나무 밑에 묻혀 있는지를 세어서 그것을 찾겠다는 다짐은 시야를 결핍된 상태로 만든다. 화면을 서사와 이미지 안에 가둬버리는, 그림을 압도해버리는 다짐을,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보고자 하는 마음을 되돌려 놓는다. 터치로 확대와 축소가 자유자재로 구사 가능한 디지털의 세상과 달리, 현실은 벗어날 수 없는 상황으로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기 때문이다. 보물상자는 일단 그 나무들 사이를, 숲 속을 걸었을 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글: 박지원, 이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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