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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회(俳詼)의 미학, 2024

 

 하나의 치아가 색면을 배회(徘徊)하고 있다. 몸이라는 치아가. 치아의 모든 주인들이 이 치아를 사냥하려고 귀여운 동맹을 맺었다. 1 뼈만 남은 자들은 몸을 갖고 싶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근육과 피부를 탐냈던 것이 틀림없다. 앙상한 골격에 붙일 골격근과 힘줄, 살갗이 있다면 이 영겁의 ‘공(空)의 공(vanitas vanitatum)’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먼 동이 틀 때 시작된 사냥은 노을이 지도록 계속되었고, 휘영청 월광이 내릴 무렵 비로소 종료되었다. 잡았다. 수렵을 자축하는 동료를 뒤로 하고 신이 난 해골이 포획물에게 다가갔다. 아뿔싸, 외마디가 절로 나왔다. 잡고 보니 살아 생전 치은(齒齦)에서 이탈한 치아가 생장한 것이었다.

 

 이 짧고도 기이한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인가. ‘치아는 걸어다니는 신체가 될 수 있다’와 같은 그런 단순한 이야기라는 것을,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그렇다. 이 설화가 전하는 가르침은 ‘치아의 법랑질(琺瑯質)과 백악질(白堊質)은 살가죽이 될 수 있고, 상아질(象牙質)은 팔다리의 근육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어떤 부조리한 것이다. 박지원(2001-)이 , 이라는 소위 ‘이빨 연작’을 통해 설파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런 어떤 엉뚱하고도 유머러스한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저술한 「Uncanny」(1919)의 제목이기도 한 ‘두려운 낯섦(uncanny)’이란 친밀한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낯설고 두려운 감정을 의미한다.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비의도적으로 반복됨으로써 두려운 낯섦의 감정을 자아내게 되고, 반복이 없었다면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았을 그 무엇을 우리는 숙명적이고도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2

 

 박지원의 ‘이빨 연작’과 그로부터 파생된 해몽은 다소 초현실적이다. 내러티브의 기묘함 외에도, 치아가 중복되어 등장하고 어슬렁거림을 반복하는 것은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기에 무던히 적합해 보인다. 그럼에도 그런 감정보다는 친밀하지 않은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낯간지러운 귀여움’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로이트에 따르면 ‘살아 있는 신체’가 생명 없는 것에 의해 다시 중복 될 때, 그것은 유령처럼 두렵고도 낯선 것이 된다.3 이에 반해 박지원의 작품에서는 ‘죽어 있는 신체’가 생명을 부여받아 움직인다. 더 이상 두렵고도 낯선 유령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귀엽고 낯익은 해골만이 합장하고 있을 뿐이다. 잇몸으로부터 유리된 치아는 그 자체로 꺼림칙한 감각을 촉발하는 존재임이 마땅하나, 표면에 살을 연상시키는 색채를 부여받고 깜찍한 팔과 다리를 선물 받음으로써 다소 우스운 ‘이-몸(tooth-body)’의 자격을 취득하였다. 박지원 작가는 다른 의미의 ‘이빨 요정(tooth fairy)’을 천연히 자처함으로써 자신의 작품과 귀여운 동맹을 맺었다.

 

                                                                                            

 

 이-몸의 앙증맞음에 대한 소회는 잠시 접어두고, 이제 이-몸이라는 도상 그 자체에 집중해보자. ‘낯간지러운 귀여움’이라는 감정은 이-몸이 표상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인식한 후 촉발되는 이차적인 미적 경험이다. 우리는 ‘이이면서 몸인 것’이라는 일차적 인지의 순간을 회상함으로써, 박지원의 낙락하고도 흥미진진한 기획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체리 파이가 있는 가짜 바니타스 (Fake Vanitas With a Cherry Pie)>는 17세기 바니타스 정물화의 맥락을 빌려 왔다는 점을 제목에서부터 시인한다. 정작 바니타스의 가장 대표적인 도상인 해골은 모자이크화 양식으로 귀엽게 소비해 버리고, 작가는 먹기 좋게 잘린 생생한 질감의 파이를 ‘가짜 바니타스’라는 명목 아래 큼지막하게 부각하는 대담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파이이면서 몸인 것’이 된다. 강렬한 붉은 색감의 단면은 마치 피부의 절단면처럼 보인다. 전면을 향해 파이 속 체리를 노출하는 동시에, 몸 속 내장을 여과 없이 꺼내 놓는다. 트리밍(trimming)한 디지털 이미지를 재해석하여 가장 상위의 레이어로 쌓은 영역은 흩뿌려진 선혈을 떠올리게 하며 ‘파이-몸(pie-body)’의 관념을 증폭시킨다.

 

 <너의 한 조각 (A Slice of You)>은 조금 더 중첩적이다. 직육면체의 형상에 가까운 조각 케익은 표피층, 진피층, 피하지방의 구조를 여실히 보여준다. 심장으로 추정되는 체리가 케익 위에 살포시 얹혀 박동하고 있고 그 아래로 정맥과 동맥, 모세혈관이 꿈틀댄다. 아울러 사람의 얼굴이 (비명을 지르는 대신)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이 기괴한 광경은 르네 마그리트의 (1934)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맥동하는 ‘살아 있는 신체’를 동원하여 ‘케익이면서 몸이면서 얼굴인 것’이자 ‘내부이면서 외부인 것’을 표현한 작업은 이야말로 두려운 낯섦의 문법을 착실히 따르고 있는 듯 하다. 가장 사랑하는 당신의 한 조각을 말없이 고이 잘라 먹어드리겠다는 진언은 ‘식물(食物)이면 서 식인(食人)인 것’에 관한 섬뜩한 선언이다.

 

 박지원의 ‘내-외부’에 관한 관념은 <인덱스 바니타스(Index Vanitas-After Willem Claesz Heda)>에 이르러 더욱 진지해진다. 윌렘 클라스존 헤다(Willem Claesz. Heda)의 (1634)를 오마주한 작업에서, 작가는 작품 전반의 불그스름한 배경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레몬의 형상을 표현한다. 배경이 레몬의 껍질, 과육, 그 뒤에 놓인 정물들까지 연이어 투과함으로써, ‘내부이면서 외부인 것’, ‘불투명하면서 투명한 것’이자 ‘형상이면서 배경인 것’이라는 변증법적 긴장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박지원은 기존의 바니타스가 ‘공 (空)’으로 끝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진정한 덧없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도상을 밀어 버려야 했다. 엄연히 ‘진짜 바니타스’를 표방한다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려야 했다. 그것은 곧 ‘공(空)의 공’이었다. 2

                                                                                      

 

 앞서 초현실주의도 비틀어 보고 바니타스도 뒤집어 본 작가는 이번에는 매너리즘 미술을 비꼬아 보기로 한다. 파르미지아니노가 (1534-40)에서 성모 마리아의 목을 과도하게 길게 표현한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목을 직접 절단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를 위해 박지원이 선택한 방법은 그리기만이 아니었다. 종교화의 권위를 단숨에 전복하기 위해 그가 떠올린 전략은 이미지의 지지체로서 작용하는 캔버스를 분할하는 것이었다. <다시 긴 목의 성모(Madonna With a No Longer Long Neck)>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힐끗 보면 성모의 얼굴이 그려진 캔버스와 목이 있는 캔버스 사이의 여백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치 성모의 머리가 목에 잘 붙어 있을 것 같은 환영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간격이다. 하지만 이 틈이 조금 더 벌어지거나 각 캔버스가 백색 벽면이라는 적당한 공간에 위치하지 않은 경우 ‘신성 모독’의 감각이 슬그머니 틈입한다. 그 순간 ‘연결된 목이면서 단절된 목인 것’이 떠오르고, 모종의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가 자리잡기 시작한다.

 

 박지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캔버스의 분할을 메타-회화적인 발상과 연결한다. 캔버스의 옆면을 채움으로써, 이미지가 수놓아진 캔버스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바로 그 이미지의 표상에 가려 자연스레 망실되는 현상에 주목한다. <오메가 에그(Omega Egg)> 와 <폴케 폴짝!(Polke Hop!)>은 각각 동일한 크기의 캔버스를 좌우로 배치한 그림이다. 두 그림 모두 작품의 왼쪽에 서서 감상할 경우, 오른쪽 캔버스 앞면의 이미지가 이어져 그려진 옆면을 발견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캔버스 의 폭이 감상의 대상이 아니었던 점을 고려할 때, 채색된 옆면의 부각은 캔버스를 단순한 지지체가 아닌 무언가로 인식하게끔 하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캔버스이면서 캔버스가 아닌 것’이다. 회화는 단순한 2차원 평면으로서의 그림인 동시에 3차원 오브제가 된다. 이러한 차원의 진동은 옆면의 두께를 약 4cm로 두둑하게 하여 제작된 <깨진 요람(Cracked Cradle)>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다른 작품들보다 살짝 더 돌출시킴으로써 (물감 대신) 캔버스의 마티에르를 지각하게 하지만 평면성을 부정하는 단계에 이르지는 않는다. 면과 입체 중 어느 하나로 수렴하지 않고 그 언저리를 배회한다. 마침내 ‘그림이면서 오브제인 것’이라는 관념의 획득에 성공한 모습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에 따르면, 위트(Wit)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을 쉽게 연관시키는 것”이며 “여러 표상들이 속해 있는 관계나 그 내재적 내용에서는 원래 서로 다른 여러 가지 표상들을 깜짝 놀랄 정도로 재빨리 하나로 연결하는 능력”이다.4 박지원은 같은 범주 내 극단의 것들을 가져와 조화로이 중첩하고 엮거나,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들을 능청스레 병치하고 연결하는 작업을 한다. 이로써 발생하는 비논리와 모순을 유희하며, 그것이 파생하는 부조리한 유머를 즐기려 한다. 작가의 위트는 매 순간 배회(俳詼)를 좇는다.

 

 “나는 자꾸만 가벼워지고, 놀리고 싶어하고, 비아냥거리고, 맞는 말에도 아니라고 말하고 무거운 순간에도 웃음을 터뜨릴 준비를 한다.”5 박지원은 재미를 추구한다. 삐딱하게 바라보고, 삐끗하게 3 빗나가며, 삐뚤어지도록 돌려보는 작가의 작업에는 일견 소연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꼼꼼히 따져 보면 눈치챌 수 있는 분명한 해학이 있다. <체리 파이가 있는 가짜 바니타스(Fake Vanitas With a Cherry Pie)>는 누군가 ‘인육(人肉)’을 떠올렸을 정도로 섬찟한 감각을 자극하기에 넉넉하지만, 제목을 곱씹으며 감상하다 보면 헛됨을 표방하였던 바니타스 정물화에 대한 작가의 풍자적인 의도에 공감하며 이내 헛웃음을 짓게 된다. <인덱스 바니타스(Index Vanitas-After Willem Claesz Heda)> 는 일견 숙연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헛된 것(空)조차 헛되다’를 시현하기 위해 (게슈탈트적 관점에 서 동시에 지각될 수 없다고 하는) 형상(figure)과 배경(ground)을 하나로 합쳐버린 그의 담력에 실소가 나온다. <너의 한 조각 (A Slice of You)>을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독특한 식성은 깊숙한 자상(刺傷)의 흔적과 맞물려 기괴하다는 느낌을 한층 고양시키나, 섭취와 소화를 위해 자비 없이 커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통곡은커녕 구슬피 유열하기만 하는 ‘케익-얼굴(cake-face)’의 엉뚱하고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다분히 컬트적이다. 심지어 목이 커트되어서 ‘더 이상 길지 않은 목’을 갖게 된 는 은은한 ‘눈물-픽셀(tear-pixel)’을 흩날리며 그윽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기존의 언어 사이를 자유롭게 배회하는 위트는 인식의 해방을 제공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위트를 통한 웃음은 논리적 사고가 갑자기 힘을 쓰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쾌감에서 비롯된다.6 박지원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온갖 것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그러다 놀릴 대상을 찾으면 요모조모 따져 보기도 하고 요리조리 조합해 보기도 한다. “미덕이란 가장 값 비싼 악덕”이라며 대립된 단어를 뒤섞음으로써 그 의미를 전복한 니체처럼7, 불현듯 기존의 개념을 뒤집는다. 그러자 대립과 구분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다. 박지원은 비로소 웃음을 터뜨린다. 배회(徘徊)의 배회(俳詼)다.

 

 사실 이 이야기의 진짜 교훈은, 뼈와 치아는 엄연히 다른 조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뼈’의 생장이라고 하였다. 과연 깔끔하다. 재미로도, 미학적으로도. 8

 

 

 

 

1.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집필한 (1848)의 첫 문장 참조.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이,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 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비밀경찰이, 이 유령을 사냥하려고 신성 동맹을 맺었다.” “Ein Gespenst geht um in Europa – das Gespenst des Kommunismus. Alle Mächte des alten Europa haben sich zu einer heiligen Hetzjagd gegen dies Gespenst verbündet, der Papst und der Zar, Metternich und Guizot, französische Radikale und deutsche Polizisten.”

 

2. 할 포스터 외, 『1900년 이후의 미술사: 모더니즘 반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배수희 외 옮김, 서울: 세미콜론, 2016, 219쪽.

 

3. 위의 책, 219쪽.

 

4.정현경, 「니체, 프로이트, 웃음: 심층심리학적 관점에서 웃음 고찰」, 『횡단인문학』 제12호, 숙명여자 대학교 인문학 연구소, 2022, 321쪽.

 

5. 박지원, 작가 노트,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석/박사 오픈스튜디오, 2024. 12. 12-15.

 

6. 정현경, 앞의 글, 334쪽.

 

7. 정현경, 앞의 글, 322쪽.

 

8. 김은숙 작가가 극본을 쓴 드라마 (2022~2023)의 등장인물 하도영(정성일 扮)의 대사 참조. “깔끔하잖아 재미로도, 미학적으로도.”

​글: 이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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